때는 A.D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중국의 청나라 13만 대군이 조선을 공격해오자 왕과 조정은 적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숨어든다.
추위와 굶주림, 절대적인 군사적 열세 속에서 청나라 군에 완전히 포위된 상황이다.
신하들의 의견 또한 나뉘어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화친파와 청나라의 공격에 끝까지 맞서 싸워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주전파 둘로 나뉜다.
이 둘 사이에서 왕의 번민은 깊어지고, 나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나라의 운명이 이곳에 갇혔다!
약 400년 전을 거슬러 다소 무거운 마음을 갖고 이 화창한 날씨에 역사적인 전장의 현장을 둘러보고자 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제일 가까운 곳은 남한산성 안쪽에 위치한 행궁이다.
행궁이란 왕이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거처하는 곳으로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행궁에서 47일간 항전하였다.
행궁에는 왕의 침전인 메인 건물 내행전과 중심 건물인 외행전 및 입구에 있는 한남루 등 여러 부속 건물이 멋을 내며 들어서 있고, 특히 건물 기둥 마다 시구를 연결하여 걸었다는 주련이 있어 그 내용을 뜯어보면 그 시대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다.
왕이 머물렀던 행궁을 뒤로 하고 남문 쪽으로 향하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게 광주유수, 수어사, 부윤, 군수 등의 선정을 베푼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들로 남한산성 행궁 복원 사업 시 이곳에 모두 모아 비석군으로 만들었다.
다시 발길을 돌려 남문으로 향해 10분 정도 올라가면 남문인 지화문이 나온다. 지화문(至和門)은 4대 문중 가장 웅장한 중심문으로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 있고,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여기서 검단산길 방향으로 접어들면 마치 독을 놓은 것처럼 생긴 제1옹성이 나오는데 옹성 내부에 장대가 설치되어 있어 수어장대와 연락을 취할 수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또 한 겹의 성벽을 둘러쌓아 이중으로 쌓은 성벽을 말한다. 적들이 성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옹성을 먼저 통과하도록 하였고,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물이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소의 옹성이 있는데 남쪽에 3개, 동쪽과 북쪽에 각각 1개소씩 설치되어 있다.
신지옹성에서의 해넘이는 정말로 아름답다.
다시 남문에서 성곽 둘레길을 지나며 수어장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성곽길을 지나 가다보면 곳곳에 쉼터도 있고, 성곽 밖으로는 강남스타일로 유명한 강남이 내려다 보인다.
수어장대(守禦將臺)는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에 자리하여 성의 안쪽과 바깥쪽을 굽어볼 수 있는 관측소의 역할을 하며, 장수(將帥)가 군사를 지휘하던 지휘소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에는 왕이 친히 군사들을 지휘, 격려하며 청나라의 13만 대군과 대항하여 47일간을 항전하던 곳이고,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인조의 아들인 효종이 볼모로 중국 심양(에 잡혀 갔다가 8년 만에 귀국하여 항상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으로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원한을 후세에 전하고 그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 27년(1751)의 뜻으로 유수 이기진이 왕명으로 서장대 위에 2층 누각을 건립하고 외부에는 수어장대, 내부에는 무망루(無忘樓)라는 현판을 설치하였다.
수어장대를 뒤로하고 연주봉 옹성으로 통하는 암문을 거쳐서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연무관을 둘러보며 오늘의 일정을 마치고자 한다.
남한산성은 험한 지형을 활용하여 방어시설인 성곽이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이 시대별 발달단계를 잘 나타낸 것으로 인정받아 2014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됨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 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인정받았다.
Hiking Artist Vi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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