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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ties

안중근 의사

현재 한국은 20세기 세계의 모든 죄악이 한반도에 다 들어와 있다.

일제 식민지배 후 남북으로 갈린 한국은 동포끼리 처참하게 죽이는 6.25 전쟁을 치렀고, 남한의 민주주의와 북한의 공산주의가 세계에서 가장 극렬하게 대치한 상태로 있고, 유교와 불교 그리고 기독교라는 동,서양 종교 문명이 공존하고 있으며, 세계의 모든 나쁜 자본주의도 들어와 세계 모든 인류사의 문제가 한반도처럼 집약되어 있는 데가 없다.

 

세계지도를 펼쳐보면 세계 4대 강대국에 둘려 싸여 여기서 살면서 살아남은 것은 기적에 가까우며 한국은 그 시절마다 몸을 던져 희생한 순국선열들이 있었다.

오늘 그 중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일본인들의 우상이며, 일본의 모든 정치권력의 중심인 이토 히로부미를 중국의 하얼빈 역에서 저격한 안중근 의사(義士)를 기린 안중근 공원을 방문하였다.

 

일본인들의 우상인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을 나열해보면

이러한 이토 히로부미를 1909년 안중근은 동지 11명과 함께 왼손 네 번째 손가락 한 마디를 잘라 피로써 항일 투쟁의 의지를 다지는 단지동맹을 맺고, 1909102610시경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만주 하얼삔에 도착하자 브라우닝 M1900총으로 3발의 총탄을 쏘아 살해하였고 현장에서 안중근은 체포되어 러시아 관할 하얼삔에서 900km나 떨어진 일본관할 여순감옥에 수감되었다.

 

일본인들은 안중근을 살인자라 말하나 살인으로 말하자면 이토 히로부미야 말로 수백만의 인명을 살상한 살인자이며 안중근은 독립군의 참모중장으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효과적인 전쟁을 수행했을 뿐이다.

 

안중근은 일본 법정에서 외쳤다.

나는 개인으로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오,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다. 만국공법에 의해서 처리하라.”

당당한 명분, 그리고 죽음을 앞둔 의연한 자세는 만주 여순감옥에서 그를 심문하고 재판하고 감호하던 모든 일본 사람들을 감복시켰고 안중근은 여순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다.

 

안중근이 일본 법정에서 사형선고가 확정된 이후부터 일본인들은 안중근의 유묵을 얻기를 원했는데, 일본 사람은 위대하다고 생각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은 더 위대한 카미()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1895년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하여 신식 학문을 접하고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으며, 도마(Thomas, 多默)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안중근이 여순감옥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죽는 것은 하나도 두렵지 않으나 홀로 남겨진 어머니가 가슴에 남아 있었다.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사형을 언도받은 맏아들 안중근에게 수의와 함께 남겨진 편지의 내용이 남겨져 있다.

 

"네가 만약 늙은 이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이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은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는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가망치 아니하노니

내세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다시 세상에 나오너라."

 

그 어미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 편지를 받고 안중근은 항소를 포기한다.

 

사형 집행 당일에도 간수가 가시죠라고 하니

내가 읽던 책을 다 못 읽었는데 잠시만 시간을 주시죠라 하고 읽던 책을 마져 다 읽고 당당히 형장에 나섰다.

일본 놈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1026일 오전 10시경에 맞춰 1910326일 오전 10시경에 안중근 의사를 사형집행 한다.

 

200여점의 유묵은 1910214일부터 326일 집행일까지 40여일에 걸쳐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는데 대부분 유실되고 현재 50여점이 남아 있다.

19951128일 부천시와 중국 하얼빈시는 자매결연을 맺었고, 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년 사업으로 20091026일 부천 안중근 공원에 하얼빈시에서 기증받은 안중근 의사 동상을 세웠다.

 

어려서부터 몸에 밴 안중근의 학문의 경지를 엿볼 수 있는 자신의 염원이나 후세에 남기고 싶은 훈계를 적은 것을 안중근 공원에 새겨 놓았다.

 

그중 몇 개만 비석에 새겨진 뜻을 사진과 함께 남겨둔다.

치오의오식자 부족여의 (恥惡衣惡食者 不足與議)

- 궂은 옷, 궂은 밥을 부끄러워하는 자와는 더불어 의논할 수 없다.

 

일일불독서 구중생형극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백일막허도 청춘부재래 (白日莫虛 靑春不再來)

-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국가안위 노심초사 (國家安危 勞心焦思)

-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황금백만이 불여일교자(黃金百萬而 不如一敎子)

- 황금 백만냥도 자식 하나 잘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

 

견리사의 견위수명 (見利思義 見危授命)

- 이익을 보거든 정의을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던져라

 

그리고 안중근 의사가 마지막으로 동포들에게 남긴 유언이 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삔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에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모두 각각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 합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이루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면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안중근 의사의 유골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 찾을 수 없다는 것이고, 현재 한국에는 서울 효창공원에 김구 선생이 마련한 비석없는 가묘만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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